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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낱말의 우주

宙 – 우주란 무엇인가?

by 유동나무 2011. 5. 24.


(Zhou/) Cosmos, Cosmos, Weltall, Cosmo, Cosmos, 우주적 시간   

+. 우주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질문하는 이와 질문 듣는 이의 존재와 삶을 홀연 급정거하게 한다. 이 질문 자체가 질문하는 이와 질문 듣는 이의 정신을 우주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 질문과 더불어 그들의 정신은 나날의 복대기는 삶, 번우煩憂한 삶으로부터 홀연 비상飛上하게 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바쁜 사람을 홀저에 한가하게만드는 마법적 질문이요, 오직 한가한 사람만이 한가하게빠져볼 수 있는 생각의 찬 못[冷澤]이다. 거꾸로 말해, ‘한가하지 않은 사람’, 물가와 환율과 주가에 민감해 있는 사람, 출세하고 영달하는 문제에 골몰해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의 나날 살이의 수면으로는 거의 올라오지 않는 질문이 바로 이 우주란 무엇인가?’라는 공허거창空虛巨創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활인의 질문이 아니라는 말이 곧, ‘이것은 생활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태는 이와는 정반대여서, 우주에 대한 질문은 비단 우주 공간에 대한 어린 아이의 막연한 호기심이 촉발한 질문이 아닌 것이요, 도리어 지상에서의 이 삶의 의미, 한정된 시간 속에서의 이 삶의 의미를 찾는 마음이 촉발한 모든 인간의 근본 질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근본 질문에 대한 답변의 역사인) 우주론의 역사는, 아뿔싸, [문학]의 역사, 과학의 역사만큼이나 유장한 것이다. 신 담론[종교]의 역사만큼이나 유장한 것이다. 우주란 무엇인가? – 이 질문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시간의 언덕을 넘고 또 넘어,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유유장장悠悠長長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인간이고, 인간이라면 결국 똑같은 질문에 봉착해왔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이곳은 어디[언제]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어떻게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존재와 자연의 근원Arche(ἀρχή)과 시간과 삶에 관한 근본 질문이다. 우주를 캐묻는 자는 다른 이가 아니라 여기[자연/시간성] 있는[존재] []’를 물어보는 자이다.    



그러나
1922년 이 유구한 전통에 하나의 단절이 찾아온다. 이 해 러시아 수학자 알렉산더 프리드리만Alexander Friedman이 우주 팽창설을 주장한 이후, 그의 주장을 이어 받아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 우주 팽창설을 입증한 이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의 진화에 관심을 두는 우주론이 탄생된다. 우주의 진화에 대한 관심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관심과 맞물린다. 만일 우주가 팽창한 것이라면, 팽창이 시작된 처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 처음으로부터 우주가 진화되어 왔다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인간 삶에 이미 와 있는우주로부터 우주 공간 자체의 기원(과 진화)으로의 관심 이동 브라이언 스윔Brian Swimme과 토마스 베리Thomas Berry가 지적하듯, 이것은 어쩌면 20세기가 경험한 가장 중대한 변화인지도 모른다
. [1] 



허블의 우주 팽창설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널리 인정되면서 등장하는 것은 그 이름도 뜨르르하신 빅 뱅 이론님이시다
. 이 이론이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인정되고 대중화된 것은, 그것이 우주의 초기 형태와 진화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맞게끔 설명하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히 말하면 불경스러운 것이 되고 말겠지만, 빅 뱅 이론의 골자란 바로 이것이다: 우주란 본시 하나의 빛덩이였는데 약 137 3천만 년 전
[2] 발생한 그 빛덩이의 커다란 뱅[폭발/Bang] 이후 계속해서 어디론가 팽창되어가고 있다는 것. 사태가 이러했으리라고 막연히 가정한 최초의 인물은 벨기에 천문학자 조르주 레메트르Georges LeMaître이지만(1927), 이러한 생각이 공식 이론으로서 가시화되는 것은 프레드 호일Fred Hoyle, 조지 가모포George Gamow 등의 이론이 발표되는 1940년 후반-50년대 초에 이르러서다.



빅 뱅 이론님이 우주론의 제왕으로 등극하신 이후
, 20세기 서구 우주론사에는 몇 번의 도약이 있었다. 이 도약의 주인공은 (이것 역시 이렇게 단순히 말해버리면 일종의 불경죄를 짓는 것이겠지만) 이를테면 인플레이션Inflationary 우주론, String 이론, 초끈Super String 이론, M 이론 등속이다. 이 이론들이 궁금하겠지만, 그 세부 내용을 알기 이전에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이론님 들 중 그 어느 분도 우리에게 우주의 전체상과 그 처음을 명명백백히 설명해주는 제왕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란 여전히 상당히 진화된 그럴싸한 우주 기원-진화론들이 서로를 제압하려 기운을 쓰고 있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세계인 것이지, 통일된 제국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이론들 중 주목할 만한 우주론은 폴 슈타인하르트
Paul Seinhardt, 닐 투록Neil Turok의 것으로, /M 이론의 틀 내에서 제기된 순환론적 우주론이다. 그들에 따르면, 빅 뱅 이론이 말한 뱅Bang은 결코 하나의 기원이나 시작이 아니다. 그들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3-Brane, 그 자신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그 자신의 형성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3-Barne(또 다른 우주)과 충돌한 사건에 다름 아니며, 이 충돌은 수조 년 마다 일어나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조 년마다 새로운 우주적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고, 이러한 시작과 끝으로서의 충돌과 반동rebound을 통해 우주적 시간은 순환된다는 것이다
. [3]



이러한 순환 우주론의 시간관은 말할 것도 없이
, 근대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가정했던,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시간으로서의 우주라는 아이디어가 무용한 것이 아니었음을 함의한다. 다만 이 이론은 충돌[]과 반동-확장의 연속적 운동을 가정하므로, 우주의 공간적 무궁성, 공간적 단일성이라는 아이디어만은 폐기하는 셈이다
. [4]



만일 이 순환 우주론이 그럴싸한 것이라면
, 우주宇宙라는 낱말의 핵심은 보다는 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공간적 무한성을 상징하는 한자어가 우라면, 시간적 무한성을 상징하는 한자어는 주이니 말이다.



고대 중국인은 도대체
라는 낱말로 시간적 무궁성을 지시했던 것일까? 이 낱말의 갑골문은 어떤 공간 안에 와 비슷한 물체가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란 무엇이었을까? 한 가설은 이 가 음을 담당하고 뜻은 ()이 담당한다고 말하지만, 어쩐지 이러한 설명은 훗날 본 뜻을 찾을 수 없어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을 시도했던 것은 이 와 같은 물체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도시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요, 이러한 어려움은 오늘날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처럼 역시 본디 집을 상징했다가 나중에는 이 현상 세계를 감싸는 무엇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주宇宙란 이 말을 만들어낸 이들에게, 또 오랜 기간 한자 문화권 사람들에게, 삶의 현상 세계 전체를 감싸 우리를 안온케 하는 거대한 지붕이었던 것이다.  



에 비한다면, 코스모스cosmos라는 서양어는 차라리 신생어다. 이 낱말의 창시자는 철학자 탈레스Thales인데, 그 본디 그리스 어[κόσμος]질서’,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 [5] 코스모스cosmos의 본디 뜻은 아름다움을 가져오는 것으로서의 질서나 법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분명 우주가 인간과 지구 생명의 삶을 감싸는 지붕이라는 아이디어보다는 진일보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宇宙가 천계天界라면, cosmos는 천리天理라고나 할까?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반쪽에 불과하다
. 고대 그리스에서 cosmos라는 낱말이 창조되는 시기에 이르면, 한자어 문화권에서도 우주宇宙 역시 천리天理의 의미를 내포하게 되니 말이다. 원시 유학의 세계에서 우주는 어떤 물리적 실체[지붕]라기보다는 가치성과 도덕성으로 충만한 형이상학적 실체로 여겨졌던 것이다
. [6] 이렇게 보면, 결국 서의 ‘cosmos’에도 동의 宇宙도 여기 이 지상에서의 삶을 해명하고 가치 있는 삶의 길을 찾아보려는 원형적 마음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원형적 마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중세와 근대의 신[지구] 중심, 인간 중심 사상이 태동하기 이전의, 옛 마음으로 시대를 거슬러 돌아갈 필요가 있다. ‘여기 이미 와 있는 우주에 대한 고대 사유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유에의 귀환에 20세기의 우주론과 우주 과학은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우주론과 우주 과학은 저 고대의 사유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를테면, 20세기 우주론과 우주생물학astrobiology은 우주의 시원을 속 시원하게 해명하진 못했어도 우주의 팽창과 진화를, 우주와 지구-생명체와의 관계를 상당히 해명해주고 있다. 1968년 우주 과학은 물 분자와 암모니아 분자가 태양계 바깥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20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초반에 이르는 동안, 우주생물학은 별과 별 사이에 있는, 별로부터 방출된 분자들이 지구 생명체의 시작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간 몸의 입자들의 기원이 결국 별의 잔해임을 알아냈다
. [7] 이러한 사실들은 결국 이 지구상 생명체들의 기원이 우주 자체라는 진리를 함의한다. 지구 내 생명의 기원이 우주 자체라는 말은 지구가 더 큰 생태계에 이어지고 그 생태계에 열려 있고 그것의 생태학적 영향을 받는 하나의 작은 생태계라는 말을 함의한다. “시적으로가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우리 자신이 곧 지구[8]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러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우주와 분리된 채 또는 우주에 닫힌 채 살아온 것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우주는 거창한 것, 거대한 것이지만, 그 거창하고 거대한 것은 지구 대기권 바깥에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공간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인간의 물리적 생존에, 바로 여기 내 물리적 존재와 삶에 이미 가까이 와 있는 무엇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만물에 이미 물리적으로 편만遍滿해 있는 것, 동시에 나를 만물에 이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것의 일점一點이요 그것의 실질實質 것이.  



이렇게 볼 때
, “우주는 아르거스(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의 왕자)’이다
[9] 라는 바슐라르의 우주 정의는 결코 시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주는 항상 눈 뜨고 있는 눈들의 총합인 아르거스인 것이다. . . 빛나는 모든 것은 보고 있으며, 세계에서 시선보다 빛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0] 물론 이것은 매우 시적인 언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적인 언명, 그리하여 현실적이지 않은 언명일 뿐인가? 차라리 이것은 만물에 스며 와 있음을 통해서, 만물의 존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우주의 성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으로 보고 있고 숨을 쉬고 있는 우리의 물리적 현실에는 이미 우주가 쓰고 있는 시가 배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주의 시적 리듬이 나의 눈과 코와 손의 움직임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11]은 아닌가? 다만 나는 이것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닌가? 토마스 베리는 우리가 더는 인식하지 못하는 우주의 춤[리듬], 삶 자체의 우주적 문맥을 다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12] 그러나 어떻게? 내가 자연만물을 개성적 실-존재자로서 응시할 수 있을 때, 그 응시를 통해 자연만물이 우주의 일점이요 우주의 눈들이라는 사태를 간파할 수 있을 때, 내가 바라보는 자연의 일물이 내 몸을 구성하는 입자와 같은 입자를 지닌 나의 형제라는 사태를 깨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이 삶이 우주의 시적 리듬의 일각임을 쾌연히 알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나의 이 삶의 리듬을 우주의 시적 리듬에 조율調律하는attune 길을 생각해보게 되리라.  (<낱말의 우주>, 궁리, 2011 중에서)   

 




[1] B. Swimme & T. Berry, The Universe Story, 1992, p. 2

[2] 정확히 말해 이 숫자는 137 3천만 년 플러스 마이너스 1 2천만년 전이다. 이 숫자는 2008 2 NASA에 의해 확정된 것이다. C. Potter, You Are Here, 2009, p. 98 

[3] P. Steinhardt, The Cyclic Universe, in Science at the Edge, 2004, p. 308; B. Greene, The Fabric of the Cosmos, 2004, pp. 406-410

[4] 이 순환론적 우주론이 시간의 무한성 또는 우주의 처음이 없음을 말해줄 수는 없으며, 이 이론 역시 어떻게 하여 그 순환 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를 원하는 이는 B. Green, 앞의 책, pp. 410-412를 참조.

[5] C. Potter, 위의 책, P. 62

[6] 이동환 역해, 대학/중용, 2000, 42-43

[7]  D. Darling, Life Everywhere, 2001

[8] D. Suzuki and A. McConnell, The Sacred Balance: A Visual Celebration of Our Place in Nature, 2002, pp. 22-23

[9] 가스통 바슐라르 (김웅권 옮김), 몽상의 시학, 2007, 236

[10]  바슐라르, 같은 책, 같은 면

 

[12] T. Berry, The Sacred Universe, 2009, pp. 14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