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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

by 유동나무 2010. 4. 14.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 무대에 <르네상스 인간>이 그 자취를 감춘 지는 오래다. 그렇기는 하나 르네상스 시대에 개화한 <보편 교양인의 이상>, 이 보편 교양인의 이상 덕에 역사에 출현한 르네상스 인간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어떤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르네상스 인간은 주지하다시피 물론 박학다식한 polymath , 한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출중한 기량과 재능을 보여주는 인간이다. 달리 말해, 여러 분야에서 높은 지식과 교양을 두루 겸비한 이를 우리는 오늘날 르네상스 인간이라 부른다.

 

르네상스 인간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독특한 시대적 풍토 탓이다. 그 풍토란 다른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트집잡기는커녕 외려 미덕으로 삼고 존숭하는 어떤 독특한 교양 중시 풍토인데, 말할 것도 없이 만일 오늘날처럼 이러한 것이 <문제>가 되고 마는 풍토 하에서라면, 르네상스 인간은 절대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교양 중시 문화가 꽃핀 어떤 시대가 그러한 유형의 인물을 만든 것이지, 어떤 특출나거나 중뿔난 천재가 태어나 르네상스 인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모든 인물은 가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서구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가 르네상스 인간을 경원하거나 혹은 폄훼하는 혹은 나타나면 곤란한 인간 유형으로 규정하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바다. 이것은 지식의 전문화가 발달한 탓도 있지만, 딱히 그것만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르네상스 인간 억압의 기제를 들여다보건대, 지식의 전문화 경향 뒤에서 작동하는, <밥그릇 나누어[분할하여] 먹기>라는 사회적 게임과 <밥그릇 서로 건들이지 않기>라는 사회적 룰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도하게 되는 탓이다.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두 투쟁인] 경제 투쟁, 인정 투쟁을 기초로 하는 다수간 경쟁 문화가 사회의 기틀 문화로서 굳게 자리잡은 사회에서, 분야간 혹은 학제간을 넘나들며 전공자 수준의 지식을 자랑하는 인간이 빛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인 탓이다. 빛을 본다? 오히려 이러한 인물이 만약 실재한다면, 그 사람은 여러 분야의 기성 터줏대감들로부터 냉대받기 십상일 터이다. 그 사람은 해서는 안될 범죄를 저지른 탓이다. 지켜야 하는 사회적 룰을 지키지 않은 까닭이다. 그 터줏대감은 물을 것이다. 과연 그이가 정규 학위가 있는지를. 그이가 어떤 대학에서 누구 밑에서 어떤 학위를 받았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이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부의 장소, 특히 큰 공부인 大學의 장소는 오늘날 대학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기보다는 책의 전당인 도서관이며, 어떤 분야의 참된 스승은 바로 그 분야에 관해 집필된 책들의 꾸러미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학인의 학업 수행 결과 평가는 어떤 분야든지 간에, 관련 중요 서적의 섭렵 여부로 진행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얼마나 많은 관련 중요 서적을 얼마나 여러 번 읽었으며,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했는가에 대한 점검을 통해서 학업 수행은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 내의 평가가 과연 이러한 의미에서의 평가가 되고 있을까? 과연 이러한 평가가 대학 내에서 잘 수행될 수 있기나 할까? 오히려 한 분야에서의 공부를 논할 때, 4 [학부과정] 혹은 9-11 [학부-박사학위과정] 정도의 공부란 시작에 불과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학 밖에서 10년이고 20년이고 한 분야를 연구한 이가 외려 그 대학 그 분야의, 갓 취임한 교수보다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을 공산은 의외로 크지 않을까?

 

어떤 이는 좋은 글을 쓰려면, 혹은 글을 잘 쓰려면, 여러 분야의 책을 다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여러 분야의 책을 두루 읽어 널리 교양을 쌓는 일은 비단 글쓰기에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긴 모르되 그것은, 보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풍요로운 삶, 보다 현명하고 건강한 삶, 보다 많은 이에게 보탬이 되는 가치 높은 삶을 일구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설사 그렇게 되는 데 큰 도움은 주지 못할지라도, 다방면의 독서를 통한 교양 쌓기는 그 독서인에게, 적어도 <기쁜 삶>은 선사할 것이다. 독서 자체가 이미 하나의 창조 행위인 탓이요, 기쁨이라는 감정이 그 안에서 용출되어 나오지 않는 창조의 체험이란 도대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 독서인이 건강을 해치지 않는 독서법을 잘 안다면, 독서의 시공을 지옥이 아닌 천국으로 만드는 재주를 갖추었다면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는 물리학자가 될 수는 없는가? 화가이면서 물리학자이면서 동시에 역사학자인 사람은 있을 수 없는가? 건축가이면서 과학사학자이면서 동시에 화가로도 활동하는 이란 있어서는 안 되는가?

 

없다, 있을 수 없다, 있어서는 안돼! – 라고 외치는 한국 사회의 목소리는 참 듣기가 싫다. 그러나 그렇게 외치며 학문의 제도[]을 혹은 제도 학문을 강조하는 사회는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니리라. 르네상스 인은 아니지만, 공부의 참맛을 아는 듯한 이인인 페렐만이 [상금 수여 거부를 통하여] 경멸한 것은, 모르긴 모르되, 그처럼 학문의 제도[], 평가의 제도[]에 집착하는 사회 혹은 그 제도성 자체일 것이다. 뛰어난 저술가이자 학자인 페리 엔더슨이 자기 이력에 학업을 넣지 않는 것도[그는 학부만 졸업했다] 그가 대학의 제도성을 경멸하고 있는 탓인지 모른다. 서점 직원으로 출발한 탁월한 산문가이자 저술가인 알베르토 망구엘 역시, 모르긴 모르되, 편협된 전문가 인정 제도나 그 제도에 유달리 집착하는 사회를 씁쓸하게 여기지 않을까?   

 

우리 세대는 말고라도, 다음 세대가 꼭 바수어 주었으면, 적어도 그 바숨을 시작이라도 했으면 하는 사회는 이런 사회다. 제 밥그릇 챙기기를 제일의 관심사로 삼는 인정과 평가의 권위체가 목청을 돋우는 사회. 게임의 룰에 순종하는 고분고분한 이에게만 그 권위체로의 입장권을 부여하는 사회. [대학 밖에서의] 평생 학문이라는 학문의 본래적 성격을 부정하는 사회, 즉 학문에 대해 자기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학과 그러한 대학을 인정하는 사회. 제도권 내 학문만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되도 않는 억설을 정설로 모시는 사회. 알곡[실제 실력]보다는 껍질[자격증-연맥]을 숭상하는 사회. 그리하여 미네르바’(자격증 미소지자-독학자)의 학문을 두려워하는 사회. 르네상스 인의 출현을 두려워하는 사회. 르네상스 인의 출현을 억압하는 사회…….


2010.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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