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쏘니 키드만Anthony Kdman은 그의 책 [고속 협로에서 제정신으로 살기[제정신 놓지 않기]: 21세기의 정서적 행복Staying Sane in the Fast Lane: Emotional Health in the 21t Century]에서 테크노스트레스technostress’라는 새로운 질병을 말한다. 벌써 그의 책 제목만 봐도, 그가 말하는 테크노스트레스의 실체가 대강 짐작이 간다. 아니 새로운 터치 형 신 디바이스device들의 도래를 목격하고 있거나 체험하고 있는 이들은 이게 무엇일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키드만은 우리의 뇌가 변화에 저항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선호하며 최대한 사태를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고전적인 뇌의 성향과 새로운 정보의 신속하고 게걸스러운 흡수를 부추기는 신세계 문화의 충돌이 현대인의 정서 불안, 스트레스의 한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의 몸과 고속의 인터넷과 신 기기 문화 사이에는 일정한 모순이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테크노스트레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키드만이 지적하는 현대의 사태는 좀더 세심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것 강박증고속 문화. 이 강박과 고속의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다. 고속으로 정보의 도로를 달리면 달릴수록,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갈망의 마음 기제는 더욱 활성화된다. 즉 새로운 것의 체험은 만족감과 행복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새로운 것의 체험으로 나아가라고, 다시 한번 그 고속을 체험하라고 그 체험자를 부추긴다. 이러한 사태의 실상을 철학자들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이러하다.

 

누군가 이러한 종류의 중독증에 빠져든다 할 때, 이 빠져듦은 함몰의 차원을 지닌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 최신 포스트를 갈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위기나 소식 또는 재미 있는 소식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은 최신 업데이트를 기다리며 웹사이트들이나 친구들 페이지를 한 사이클을 돌지만, 결국 발견하는 것은 이 사이클 돌기가 끝났을 경우 지난 번과 똑같이 갈망하고 기대하며 그 사이클을 다시 한번 더 돈다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은 항속적이고 끝을 모르며, 최신 포스트는 당신으로 하여금 더 많이 욕망하도록 만들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중독과 더불어 당신은 다음에 무얼 해야 할지 분명히 안다. 그러나 그 일을 끝내는 일은 당신을 그 길 위에 서게 한 그 갈망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데 실패한다.” (H. Dreyfus and S. D. Kelly, All Things Shining, p. 7)      

 

달리 말해 이러한 사이클 체험은 그 체험으로 인해 한번 들뜨고 조급해진 마음을 계속해서 들뜨고 조급하게 하는 자극력이 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이의 마음은 너무 적은 시간에 너무 많이, 즉 고속으로 접한 정보로 인해 마음의 번쇄를 느끼는 것을 넘어, 계속해서 마음의 조급함과 들뜸을 느끼는 것이다. 결과는 당연히 쉬지 못한 마음과 몸의 눅진눅진한 피로, 테크노스트레스다. 새로운 것과 관련되는 뇌의 호르몬 도파민을 흐르게 함으로 그 체험자는 즐겁지만, 이 즐거움은 분명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체험되는 즐거움이다. 즉 최고의 즐거움이 아니고, 급이 낮은 즐거움이다.

 

필자는 신 기기의 체험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이 질 낮은 즐거움에 관해 말해본 바 있지만, 이 발언은 기실 신 정보의 고속 흡수라는 체험의 사태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신 기기도 신 정보도 그 체험자를 만족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지 못한다.  

 

이러한 욕구 충족 시스템 아래에서는 누구든지 끊임없이 만족-불만족이라는 쳇바퀴를 빨리 맴돌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 빠른 맴돎이라는 과정에서 잠깐씩 맛보는 기쁨의 실체는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다…..이러한 기쁨에 익숙해진 인간에게 세계는 대개 지나가고 말며, 음미되지 않는다. 음미 되더라도 그 시간은 극히 짧다. 깊고 실하고 오래가는 기쁨의 경험자는 늘 시간의 정지 역시 경험한다. 그러나 무언가를 기뻐하는 그 즉시 다른 기쁨을 모색해보는 정신에게 시간은 절대 정지하지 않는다.” (우석영,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39-40)     

 

그러나 사태는 결코 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가지 꼭 언급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가 망각을 친숙한 체험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순간만을, 또는 현재와 근미래만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삶이란 기억함을 등한시하는 삶이다. 새로운 것을 체험하기에도 급급한데, 어찌 정신의 에너지를 과거의 사태를 성찰 내지 기억하는 데 쓸 것인가!

 

그런데 정치학자 월린에 따르면, 이러한 망각 친화는 개인의 지평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게 아니다. 고속의 문화, 신속한 변화의 문화, 망각의 문화 속에서 소멸되는 것은 집합적 기억이고, 집합적 기억의 되새김질이고, 나아가 (집합적 죄의식을 가질 만한 사태에 대한) 집합적 죄의식이다.   

 

미래에 고정된 사회, 신속한 변화라는 광란에 포획된 사회는 상실의 결과에 관해, 특히 널리 공유된 적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법을 알기 어려운 사회다. 변화 중 많은 것들은 어쩔 수 없이 기성의 삶과 신념을 갈아엎고 대치한다는 점에서 파괴적이다. 망각은 규범이 된다.….신속한 변화는 단지 집합적 양심을 무디게 할 뿐만 아니라 집합적 기억 역시 희미하게 한다. 너무나 많은 과거들이 순간적으로 지나가고 사라진 나머지 시간의 범주 그 자체가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집합적 기억의 부재는 곧 집합적 죄의식의 부재를 의미한다.” (S. Wolin, Democracy Inc, p. 275)

 

만일 사태가 정녕 이러하다면, 새로운 디바이스들로 인해 더욱 활성화된 고속의 새 정보 흡수 문화란 결코 장밋빛 문명의 도래를 함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일종의 디스토피아의 면모를 거느린다. 그것은 개인의 마음을 휴식과 만족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정서적/신체적 질병을 초래하고, 집합적/공동적 양심과 기억을 흐리게 하며, 그리하여 집합적 당위 행동을 둔화시키는 효과조차 지닌다.

 

요컨대, 만일 우리가 전례 없이 신속하게 새 소식과 정보를 얻고 체험하는, 전례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면, 이 전례 없는 즐거움은 전례 없는 질병을 함께 초래하는 즐거움이다. 이 전례 없는 즐거움이 과도하게 찬양되고, 과도하게 체험되는 반면, 이 전례 없는 질병은 과소하게 지적되는 오늘날 화급한 것은 의당 이 질병의 자각이고, 이 질병의 언급이다. 물론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해법을, 치료제를 찾아 나서야 한다. 닥친 위험, 닥칠 위험을 아는 자는 그 위험에 빠지지 않는 법이다.

 


posted by 소서재인


최근 세계[라기보다는 산업화된 세계 일부]를 뒤흔든 바 있는, 애플 사의 전 CEO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디자인은 제품, 서비스 연속적인 외층에 표현되는 인간 창조물의 영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와 애플 사가 강조한 것은 인간 창조성, 혁신성, 디자인과 같은 가치다. 그러니까 그간 사람들을 열광시킨 것은 모두 문화와 창조성, 창조적 삶에 관련되는 가치인 것이다. 그래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도 하고, 창조성의 세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애재라, 21세기는 그와 동시에, 그만큼이나 기후 변화의 시대,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의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나아가 우리는 애플 사가 제조한 전자 제품들의 부품들 모두의 근원적 출처는 자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전부 자연 생명계로부터 인간이 가져와 (각종 연구소, 실험실에서) 변형한 것들인 것이다. 조금 달리 말하면, 인간의 문화적 창조성은 자연계라는 물리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지, 그것의 부재 속에서, 그것과 적대하며 가능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인간 창조물의 영혼”이라는 디자인에 대한 감각 역시 인간이 자연계와의 교감을 통해 발달시킨 것이지, 다른 식으로 발달시킨 것이 아니다. 색채, 색채의 채도와 명도, 직선과 곡선, 면과 점, 원과 원뿔과 원기둥과 구, 공간적 깊이와 넓이[입체성], 얕음과 깊음, 선형과 비선형, 규칙과 불규칙, 대칭과 비대칭, 단장과 원근, 단순성과 복잡성, 일체의 패턴, 이 모든 디자인의 요소는 이미 생명[물], 자연물 속에 들어 있는 바, 모든 디자인의 근원적 출처는 인간 영혼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 지각 행위, 그 누적의 체험인 것이다. 가령 인간의 체세포 하나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때, 그 들여다보는 사람은 마치 마티스와 피카소와 몬드리안과 칸딘스키, 이 모든 천재적 예술혼들이 합작하여 만든 상상적 작품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을 보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어찌 디자인 감각의 출처가 생명 지각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랴.


요컨대 인간의 문화적 삶, 창조적 삶 일체는 어떤 생물물리적, 생화학적 토대 위에서만 가능해온 것이고, 그 토대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자, 생명의 존재 그 자체로서의 생명의 우주적 율동인 것이다. 문명과 이 생명물리적 토대간의 교섭 행위 자체의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되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마땅히 생명의 자리로 내려가, 생명의 문화 선행성, 문화 포섭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 등의 창조혁신론, 디자인론은 오직 이 지속가능성이 의문시되지 않는 시대에만 참으로 가치 있다는 것, 이 지속가능성 의제를, 생명에 대한 관심을 괄호에 넣은, 창조성/문화/디자인 가치의 역설은 반편이의 장애 담론이라는 것이다.)


posted by 소서재인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궁리, 2011)에 대한 서평적 성격의 비판글이 있었다. 이화여대 박경미 씨가 써 프레시안에 발표한 글이다. 프레시안에 박 씨의 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 공개 비판을 하려다 그만두기로 하였다. 도대체가 ‘서평’에 대한 비판도 있나, 싶기도 한 탓이고, 또 그렇게까지 역자가 나서서 발언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한 탓이다. 그러나 이대로 덮고 가면 책을 접해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오해가 있을 성싶어, 이곳을 통해 필자와 가까운 이들에게, 또 몇 안되겠지만 이곳 방문자들에게 몇 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프레시안에 올라온 서평을 링크한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923135716&section=03



우선, 박 씨의 서평은 악의적 성격이 짙은 글로, 서평을 쓰려는 모든 이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글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서평을 쓰는 자는, 책을 어느 만치 읽어본 이후에 써야 함이라는 덕목 이외에도 다른 최소한의 덕목을 갖춘 자야만 한다. 그것은 책을 아직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책의 정수나 본령, 특색을 적절히 소개하는 것이다. 즉 이 소개가 주가 되고 비평적 소견이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는 않다 해도, 비평적 소견이 성실한 만큼이나 소개도 성실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최소한의 기본 요건이다.  

 

한데 박 씨의 글은 어떠한가? 이 주종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고 성실성의 비중이 완전히 한쪽으로 경도되어 있다. 책의 정수를 말하는 대목에서 박경미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전혀, 아니라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앞부분은 어느 보도자료를, 또는 학점 C를 받음직한 어느 대학생의 책 요약 리포트를 짜집기한 느낌이다. 이건 이 글 자체, 글쓴이가 아예 책에 대한 소개로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불만스러웠던 점을 이러쿵저러쿵 성토하고자 쓴 글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짧은 지면을 고려한다면 저자의 논지를 드러내는 대목을 인용함이 마땅한데도, 그 논지와는 가장 무관하다 할 정도의 지엽을 인용한 처사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준다. “여러 가지 미덕에도 불구하고~~~”라고 했지만, 박씨가 언급한 그 여러 가지 미덕의 내용도 허술하기 그지 없고, 그 허술한 내용 또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박 씨의 글은 서평을 위장한 제잘난시늉에 불과하다. 글이란 무서운 것이다. 박경미 씨는 어찌 글을, 독자를 이토록 우습게 보는가?

 

둘째,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통해 저자가 꿈꾸는 세상이 무엇인지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 오독의 결과다. 저자가 분명 어떤 사회가 살 만한 사회인지를 이야기하고 있고, 이를 필자가 ‘옮긴이의 글’에서 간명히 정리해놓았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한 것은 책도 필자의 글도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다 평등하고 보다 다원적인 민주사회라는, 저자의 지향점을 제대로 읽었다면, ‘엘리트 시민 교육’이라는 완전히 근거 없는 비방을 할 리 만무하다. 누스바움이 엘리트 교육을 운운하고 있다? 그런 사람이 인도의 빈촌 내의 국어교육을, 가난한 여성들이 참여하는 교육을 말하나? 그런 사람이 사회주의적 실용주의에 감탄했던 철학자 존 듀이의 교육 철학을 그토록 강한 목소리로 옹호하나?  

 

셋째, 인문학 교육이 곧 민주주의 교육을 보장할 것이라고 저자가 전제하고 있어 문제라는 지적에 대하여. 박 씨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인문학 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앞서 말한 오독이 소소한 오독이라면 이 지적은 중대한 오독의 결과다. 아니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책을 거의 읽지 않은 것이나 진배 없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 책의 서평을 쓸 수가 있나?

 

저자의 논점은 민주주의를 하려면 시민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한 시민을 길러내려면 인문 교육을 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인문학 교육, 시민, 민주주의가 삼각형의 세 변이다. 즉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이 곧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으로 이어진다는 말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듀이, 타고르, 프뢰벨, 페스탈로치, 올컷, 랄프 앨리슨 등에 관한 논의를 통해 줄곧 주장되는 핵심 알맹이다. 이것이 이 책의 척추다. 그래 이 책의 부제가 ‘왜 민주주의에는 인문학이 필요한가?’이다. 이 점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이것이 전제되어 있다니 도대체 무슨 헛소리인가?

 

현재의 인문학이 바뀌어야 한다”니? 그 현재의 인문학은 한국의 현재 인문학인가, 미국의 현재 인문학인가? 저자는 영어권 독자를 위해 이 책을 쓴 것이다. 어떻게 저자가 현재 문제가 있는 한국 인문학을 또는 세계 전체의 인문학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저자가 가르침의 내용이 되어야 하는 인문학, 예술 교육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넷째, “진정한 대립은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과 '인문학 교육'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악마적인 지배를 유지하는 인문학 교육과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인문학 교육 사이에 있다”는 말도 엉터리다. 만일 참된 대립지점이 그러하다면 저자가 입에 불을 달고 비판하는 인문학 예산 삼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경제 성장의 이념이 문화의 지층 깊숙이 들어와버린 비극이 박 씨의 눈에는 안 보이는가? 박 씨의 눈에는 인문학 교육밖에는 안 보이는가? 비즈니스니 과학이니, 엔지니어링이니 하는 분야에 대한 세계 전체의 쏠림 현상이 안 보이는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이라는 말도 우습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두 다 아는 양 가정하고 글을 썼는데, 이런 가정이야말로 엄밀한 정신이라면 무엇보다도 기피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자본과 국가의 지배를 유지하는 인문학 교육이 그렇게 걱정되었다면, 현재 인문학 교육이 그러하다고 가정하지 말고, 그러한 인문학 교육의 구체적 실상을 지적했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교육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이익을 위한 것이다”는 지적도 터무니 없는 지적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이익을 위한 교육’이란 국익, 사익을 위한 교육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가 고안한 일종의 개념으로서, 경제적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에 철저히 종속되는 이 시대의 지배적 교육 트렌드를 압축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박 씨는 이러한 교육 현상을 비판하고자 도입된 이 개념이, 그리고 그 교육 현상에 대한 비판이 무용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보다는, 이 개념의 알맹이는 빼버리고 그 말만 이용해 자신의 어설픈 논지에 아전인수격으로 붙여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여섯째, 저자는 이 책을 세계 고등교육 기관의 혁신을 호소하고자 썼다. 대학들에서 인문 교육을 살려내야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에 대한 소개는 쏙 빼어버리고, 현 자본제 체제를 멈추는 일은 왜 말하지 않느냐, 왜 그 체제와 직접 대면하지 않느냐, 지적하는 태도는 굉장히 이상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저자는 분명 그 체제와 교육 영역이 맞붙은 지점을 직접 대면하면서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자학적 시스템 운운은, 그 시스템을 멈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은 물론 일리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학적 시스템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언론사에 서평이랍시고 글쪼가리 보내면 멈추어지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말 한번 하면 멈추어지나? 오히려 현실집행력이 있는 이들, 현실개조 영향력이 있는 이들을, 나아가 시민들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누스바움은 그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시민의 운동 없이 자학적 시스템에 대한 성찰도, 그 멈춤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시민 교육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나아가 한국과 같이 시민 교육이 엉터리인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 책은 그래서 중요하고 값지다.

 

총평하자면, 박경미 씨의 누스바움 비판 가운데 미국의 인문학 지원 시스템, 그 실상을 살펴보고 그것을 논했어야 한다는 대목만이 유일하게 경청할 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말단에 불과한 그것을 인용까지 하며 과도히 부각시켜놓았음은 앞서 지적한 바 그대로다. 비판 가운데 나머지 부분은 책의 부분적/총체적 오독, 엄밀하지 못한 사유, 애써 찾은 결점을 물고 늘어져 부각시키려는 과도한 비판 의지의 흉한 뒤범벅일 따름이다.

 

서평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질도 갖추지도 못한 그 이상한 평문은, 누스바움이 강조한 민활한 비평 정신이 도덕적, 지적 엄밀성의 기율의 제어를 받지 못하는 경우 얼마나 흉한 꼴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해보자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단지 비평 정신, 비평 정신의 교육만이 아니다.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나아가 도덕적으로) 성실엄밀하지 않은 길은 가지 않겠다는, 마음 심저와 연결되어 있는, 결연한 소크라테스적 정신 태도와 그러한 태도의 교육이 더 중요하다. (이 태도가 무엇인지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중요하다.) 이러한 태도와 분리되는 경우라면, 일체의 비평 행위 자체가 아예 무의미하거나 추해질 수 있다.



   

 

   

   

posted by 소서재인

 

사내다움/강함/지배의 이념에서 여성성/모성/상호호혜의 이념으로

이 외에도 논리의 실용성, 놀이와 예술의 교육적/민주주의적 효용 등 한국의 교육/사회 사정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큰 주제들이 있어 필자의 손을 유혹하지만, 그 중 인간 허약성vulnerability과 여성성/모성에 관한 저자의 논의만 마지막으로 언급해보고자 한다. 우선 전자부터. 저자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어린 시절부터 직감적으로 알게 되는 인간의 본래적 허약성, 불완전성은 (배설물 배출자, 동물적 성질의 임자, 죽을 운명의 임자로서의 불완전성) 자기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고,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특정인들에게 그 자기 혐오감을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경향이 어린이 교육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타자 공감과 이어지는 입장 전환적 사고positional thinking 능력, (놀이, 예술을 통한) 타자 상상/공감 능력의 조기 계발을 통해서 평등성/다원성의 원칙을 강화하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인간의 본래적 허약성과 (그에 따른) 상호의존성이란, 루소가 강조했던 것처럼, 공동체다운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근본적 이유로서 적극적 포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 원칙이 그것이다. (74)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 원칙은 오늘날 그저 당위 과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즉 오늘날 완벽성, 통제/지배, 사내다운 강함이라는 가치를 인생의 성공과 연결 짓는 생각, ‘오염된타자 집단에의 혐오감 투사행위 (그리고 타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 찍기 행위), 그 행위 뒤 심리 기제로서의 이분법적 선악관을 양산해내는 문화적 기제는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이다. (73-75)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저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이지만, 이러한 지적은 오히려 남성중심적 문화가, 폭력과 표리表裏 관계에 있는 사내다운 강함이라는 가치를 기꺼운 것 또는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는 문화가 (한국 산 액션/무협/역사 영화/드라마들의 화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그 숱한 피들을 생각해보라), -서구 출신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감 투사 행위가 번성해온 한국사회에서 더 큰 호소력을 갖지 않을까?  

 

저자가 강조하는 여성성/모성의 계발은 인간 허약성이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여성주의 철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은연 중 계속해서 여성성/모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남녀 모두 모성을 함양하여 남을 더 사랑해야 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육자는 모성의 실천자가 되어야 한다는, “인간 본성의 정수는 본디 모성적이라는 페스탈로치의 언명을 저자는 중요하게 언급한다. (113-114) 또 아기 돌보는 이로서의 엄마는 성적 범주라기보다는 기능적 범주일 뿐임을, 의사/정신분석가는 본질적으로 모성의 실천자임을 강조했던 위니코트의 입장 또한 잊지 않고 언급한다. (171-172) 그뿐만 아니라 저자는 평화 선호의 기질” (191) 함양을 역설한 헤르더를, “관용적이고 유희적이며, 타자를 지배하는 데 무관심한 남성의 인성” (같은 면) 계발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타고르를 힘주어 소개한다. 나아가 비폭력주의 운동과 지배-피지배적 성관계의 극복을 (그리하여 폭력적 남성성의 극복을) 연결시켰던, 그 자신 중성성과 모성을 부러 수양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던 마하트마 간디 역시 중요한 참조점으로 언급한다. (같은 면) 심지어 저자는 참다운 남성성/여성성의 상을 갖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 자체에 굉장히 중요하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190)

 

왜 이렇게 저자는 여성성/모성을 힘주어 말하는 걸까? 이 책에서 저자가 건드리고 있는 많은 주제들처럼 이 주제도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법한 거대 주제이기에, 여기에서는 앞서 말한 한국의 특정 문화와의 관련에서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문화적 화두를 다시 들어보면 이러하다. 어째서 한국의 문화는 (군사주의적, 남성적) 폭력을 철저히 증오하거나 멀리하지 못하는 문화인가? 어째서 그 문화는 사내다움의 강함이라는 가치에 알게 모르게 친근한가? 그 연원으로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외세의 국내 침탈로 인한 집단적 치욕의 체험과 그로 인한 설욕의 당위 정서, 그리고 한국 전쟁의 체험일 테지만, 즉 허약함 자체를 용인할 수 없게 하는 상태의 체험일 테지만, 단지 그뿐일까? 그 대외적 설욕의 주체, (붕괴된 나라의) 대내적 건설의 주체로서 나타난 국가는 어떠한가? 그 국가가 시민을 근로자-국민으로 호명하고 채찍질하고 군림해온 역사, 즉 국가 폭력/통제/지도의 역사 자체는 어떠한가? 이 역사가 87년 이후 또는 97년 이후 멈춘 적이 있는가? 그 폭력/통제 가치의 전국민적 내면화의 역사는 어떠한가? 이 내면화 과정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체계가, 그 체계의 폭력적 중압성 자체가 지속적으로 강화시켜온 것은 아니던가? 그리하여 개인적 차원의 생존, 집단적 차원의 문명 건설, 이 이중 요구가 폭력/통제/사내다운 강함 불가피성성의 감각 자체를 키워왔던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그 감각은 가정에, 학교에, 기업에, 사회에 하나의 문화적 기풍으로 확립되어 온 것은 아닌가? (그저 남존여비 사상의 사회, 가부장 본위 사회의 일정한 연속이기에 남성중심적 문화가, 사내다움의 가치가 용허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저자가 제시하는 인간 허약성/사내다운 강함/여성성이라는 주제는 어쩌면 오늘날 한국 사회, 한국 사회 문화의 심장부에 있는 주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폭력/통제/사내다운 강함 둔감/용허의 문화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이 문화의 일신이 필요하다면, 그 시작은 인간 허약성을 허약성 그대로 인정/포용하는 입장 전환, 그리고 상호호혜/돌봄의 감각의 함양일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의 여성성/모성의 수양으로, 나날의 삶의 마당, 사회적 거소에서의 이러한 심성의 부단한 훈련으로, 그러한 심성의 교육으로 그 일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의 여성성/모성 강조에, 인간 허약성 포용 원칙의 강조에, 이 원칙 하의 공감/공존 능력 계발 교육의 강조에 우리의 귀는 보다 더 크게 열려야좋으리라.     

 

                   

교육의 네비게이터는 곧 사회의 네비게이터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근래 고등교육계의 경제 성장 본위의 트렌드가 민주주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저자의 진단을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생각해보며, 이 어설프게 풀린 글타래의 끝을 묶어볼까 한다. 이 진단과 관련하여 먼저 말해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제도와 문화로서 정착시킨 사회에나 어울릴 만한 진단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 진단은 민주주의의 제도적/문화적/시민적 기반이 허약한 사회인 한국 사회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진단이라는 것이다. 물론 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일정한 민주주의 제도를 꾸려왔고, 시민 사회라는 전에 없던 민주주의의 기반 역시 마련되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권익 보호를 중심 이념으로 삼는 이념 정당들의 제도적 정착이 되지 않은 마당에 과연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국가권위주의/관료주의가 여전히 강고하고 개인간 경쟁의 문화, 정치-무관심의 문화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 어느 구석에서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상호간 논리적 대화, 공감에 기초한 대화가 넘치는 민주주의 문화를 발견할 수 있을까? 각종 시민사회단체의 발흥과 더불어 시민 사회가 국가를 견제하는 움직임도 (대략) 지난 15년간 지속되었긴 하다. 하지만, 그 사태가 곧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을 갖춘 시민들의 자기조직화라는 사태라고 말해도 좋을까? 최근 평창의 사태는 우리에게 아니오의 답변을 요청하는 듯하다. 이렇게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문화적/시민적 기반은 아직 허약하다.  

 

그러므로 한국의 경우, 예의 저자의 진단을 적용해본다면, 민주주의가 아직 확실히 생명체다운 생명체로 형성되지도 못한 가운데 교육 자체가 그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진단이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다소 암울한 사태의 인식 그리고 저자의 교육/민주주의 함수관계론에 대한 경청은 그 인식/경청의 당자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시민적 기반 형성과 관련되는) 교육의 과제와 사회의 (민주주의의) 과제의 일체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의 시민적 기반이 오직 학교 교육으로만 형성되는지, 다른 요소는 없는지도 물어봐야겠지만, 그 시민적 기반 형성에의 학교 교육의 심중한 역할은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동시에 교육 문제의 심화가 곧 민주주의 문제의 심화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즉 교육이라는 함선의 경로를 지시하는 네비게이터가 적신호를 표시할 때 그 적신호는 민주 사회라는 함선의 경로, 그 자체의 적신호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재차 암시했듯, 한국의 (학교) 교육 문제가 지시하는 과제는 결코 하나가 아닐 것이다. 교육 문제는 단지 학교 내 교육 개혁 (예컨대, 상위교육기관인 대학에서의 교육 개혁) 만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또 지금과 같은 식으로 관-주도 개혁으로 온전히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교육의 실패를 어떤 문화의 실패, 삶의 가치관의 실패, 기풍의 실패로 봐야 하리라. 이 실패에서 오래된 국가주의의 괴물을 봐야 하고, 그 국가주의와 일상의 을 섞었던 우리 자신의 삶의 역사를 살펴야 하리라. 나아가 교육의 배면에 깔려 있는 치열한 경제적 경쟁 질서와 문화 역시 살펴야 하리라. 이를 거꾸로 말하면, 사회의 사회경제적 체계의 혁신적 변화 없이, 국가주의와의 제도적/이념적/문화적 단절 없이, 문화적 기풍의 혁신, 삶의 가치관의 일신 없이 인격 계발이라는 교육 본연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을 우리가 목도할 길은 영영 없으리라.  

 

그러므로 참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교육자이든, 학교에 자녀를 보내며 안쓰러워 해온 학부모이든, 그들의 관심 대상인 학생이든, 또는 그렇지 않은 평범한 시민이든, 궁극적 관심사는 자체에, 즉 모두의 삶, 자신의 삶 자체에 두는 것이 옳겠다. 혹자는 한국의 입시를 입시 지옥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교육 자체를 지옥의 교육이라 부를 이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정말로 지옥의 교육이라 불릴 만한 교육이라면, 그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길은 학교 내에 있지 않을 것이다. 지옥을 좀 더 나은 지옥으로 개선할 길은 학교 내에 있겠지만, 이 책에서 저자 너스봄이 말하는 것과 같은 교육, 존 듀이와 타고르가, 페스탈로치와 브론슨 올컷이 실험/실천했던 것과 같은 교육다운 교육, 인격 개화 본위의 교육으로 가는 길은 학교 밖에, 즉 삶이라는 학교에 있을 것이다. 

 

짧지만 매혹적인 교양 콤팩트compact 세트와 같은 이 책을, 교육의 주제를 사회와 삶의 맥락에서 논의하는 이 책을, 교육의 마당에 자신의 삶을 한 발 담그고 사는 일부 시민/학생만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와 삶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많은 한국 시민들이 읽어주길 바라는 소망의 소이所以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 있다. (끝)

 

 

posted by 소서재인


개화된 인격의 모습과 시민

그러나 인간다운 인간으로 개화된 인간이란 이념형적 도덕군자의 주형에 딱 들어맞는 이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런 이는 사회공동체 내 타인들과 바람직한 방식으로 이성적/감성적 교섭 활동을 할 수 있고,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자신을 둘러싼 생태계에 (그 생태계 내 타 생명체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공명commune할 수 있는 이, 즉 대화와 공감/공명이라는 인간다움의 덕목 또는 능력을 갖춘 이일 것이다. 나아가 이 대화와 공감/공명을 너무나도 천연스럽게 자신의 삶의 의무로 느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생태계라는 삶의 둥우리community의 진보에 낱 구성원으로서 (즉 시민으로서, 생명체로서)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이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자가 참으로 보람을 느끼는 때는, 타자와 공감/공명 상태communion에 있고자 하는 (피교육자의) 인간다움에의 본원적 의지가 교육이라는 인간의 길을 통해 넓은 삶의 둥우리에의 자발적/독립적 기여의 행동으로 구체화/현실화되는 때일 것이다. 보다 간명히 말하여, 가치 있는 공동체적 존재로 있고자 하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있고자 하는 인간-존재됨의 의지가 공적 장에서 실현되는 때일 것이다.

 

이로써 필자는,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궁극의 교육 목적이라는)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의 개화란 무엇이냐는 가능한 질문에 대해 이미 답한 셈이 된다. 정리하여 강조하자면 그것은 공감/공명의 존재로의 개화, ‘의무의 존재로의 개화일 것이되, 여기에서 이 의무는 자기 존재됨[자기실현]의 기쁨과 분리될 수 없는 의무일 것이다.  

 

공감/공명 능력의 임자, 그러면서도 삶의 둥우리에의 기여를 삶의 기쁜 의무로 생각하는 이를 부르는 말로 가장 근접한 말은 그런데 지식인도 아니고 문화인도 아니고, ‘교양인아니면 시민일 것이다. 저자 너스봄이 이 책에서 그토록 일관되게 시민 되는 일을, 즉 비판적 사색 능력,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상하고 타인과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이, 동시에 세계화된 시대 자신의 행위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이로서의 세계적 시민이 되는 일을 역설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여, 교육받은 이란, 너스봄이 우리에게 주는 힌트를 참조하여 말한다면,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의당 해야 기쁠 일을 하는 이, 그러나 타인들과 만나며, 동시에 자기만의 독자적 논리적 판단 하에서 그렇게 하는 이일 것이다.     

      

동료(또래) 압박의 수인에서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의 자유인으로: 평창의 경우

이와 이어지는 것으로, 학생들의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 함양에의 저자의 방점 둠 역시, 그러한 능력의 함양 따윈 학교 내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하라고 권유하는 어떤 기이한 사회에선 큰 함의를 갖는다. 저자가 역설하듯,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은 시민 능력의 가장 근간이 되는 요소로서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 이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현실태가 아니라 환각적 상상이미지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국인은 87년 이후 일정한 민주화 과정을 경험해왔지만, 이 민주화 과정이 실제로 이러한 핵심적 자질을 갖춘 시민들이라는 기초 위에서 진행되었는지, 그러한 시민들을 (학교) 교육을 통해 형성해가고 있는지는 크게 의문이다.

 

근자의 한 경이로운 사건은 이러한 의문이 가치 있다고 말해준다. 바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다수의 암묵적 지지라는 사건이다. 어떻게 다수가 이를 지지할 수 있[]? 짐작일 뿐이지만, 유치 지지의 심리 기제 내에는 이는 한국의 승리라는 단순 아이디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승리는 물론 세계 속 한국의 승리로, 세계 속 한국 축구의 승리와 등치되고, 세계에 한국의 저력을 보여주는 이 승리의 가치는 한국사회에선 신성불가침의 진리 가치이므로 이러한 승리의 이미지와 포개지는 평창 올림픽 유치라는 사건 역시 신성불가침의 지지/환호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생각의 연쇄 뒤에는 다른 신성불가침의 생각 역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국가 경제 성장으로 상징되는 국가 발전이 국가에 소속된 국민들 전체의 행복 증진을 보장한다는 생각. 개인의 삶의 갈피갈피에 국가보다는 기업이, 자주 초국적 기업이 더 큰 지배력을 발휘하는 오늘날 이러한 생각은 맹랑하고 허술한 생각이기 그지 없건만, 이러한 생각을 진리로 당연시하는 이들에게 평창 올림픽 유치는 단지 한국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적 승리가 된다. 어떤 식으로든 올림픽 유치는 국민의 전반적 행복 증진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단순 가정은 위험한 것, 허구적인 것이라고 결코 의심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올림픽 유치는 환영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의 전제가 되는 생각은 시민 개개인의 이성적 판단 능력에 의해 검토되지 않는다.

 

평창과의 경쟁후보지였던 (프랑스) 안시와 (독일) 뮌헨의 경우 시민들의 강력한 유치 반대 운동이 있었다는 소식은 이러한 지지가 과연 온당한 것인지, 이 책에서 저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소크라테스식 자기검토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새삼 생각하게 한다. 어떤 부작용을 예상할 수 있기에 그들은 반대했나? 동계올림픽 행사를 준비/진행할 경우 경제적 측면에서 역효과는 없나? 이 올림픽을 유치하면 정말로 모두가 균등히 혜택을 보나? 올림픽 유치로 국가 경제는 정확히 어느 만큼성장하나? 그 예측법은 정확한가? 올림픽 시설 건설로 인해 부가적인 경제 손실(예컨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경제 손실), 다른 가치(예컨대 생태계 자체의 생태환경적, 심미적 가치)의 손실은 없는가? 올림픽 유치와 이에 따른 시설 건설과 개발을 지선至善으로 보는 개발 패러다임은 과연 개발의 사회적/생태적 비용을 문제삼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옳은 패러다임인가?……이러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한국 시민들이 이러한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삼[]는지 필자의 머릿속에는 커다란 의문부호가 구름처럼 동동 떠오를 뿐이다. 이러고도 과연 한국 시민들은 이 책에서 강조되는 만큼 충분히 독립적인 비판 사고 능력의 임자라고 여겨질 수 있는가? 오히려 한국인들만큼 종종 너무 쉽게 남의 의견에 흔들리는” (99) 이들도, “가축 떼에게서 관찰되는 순종” (112)의 임자들도, 동료[또래]압박peer pressure에 크게 영향 받는 이들도 (구입 후 채 수삼 년이 안되어 신형 휴대폰으로 구형 휴대폰을 교체하고 이를 당연시하는 거의 세계 유일의 광적 휴대폰 구매-폐기 문화를 생각해보라) 드물지 않은가? 한국인들의 대중 문화란, 자기만의 독자적 기준에 의한 검토/판단 대신 ‘~라더라라는 풍문이, ‘-이지요라는 명망가의 권위적 발언이 (2010년을 뒤흔든 저 하버드 대학 교수를 비롯한 그 모든 스타-지식인들의 철의 권위를 생각해보라), 대세大勢 (한국의 정치 진보를 막아온 사표 방지 심리라는 오래된 악령을 생각해보라) 자신의 행위/의견을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가 되고 마는 사람들의 문화가 아닌가?      

 

만일 사태의 실상이 필자의 이러한 추측적 진단 그대로라면, 우리는 이 사태의 연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엇이 이유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분명 교육 과정상의 독립적 비판 사고 능력의 훈련 부재일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훈련을 억지해온 것은 주입식/암기식 교육,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는 오래된 패러다임일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서 저자가 그토록 혀에 불을 달고 비판하는 그 패러다임 말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하에서라면, 학교는 지나가야 하는 필요악의 하나의 통과 과정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프로세스되어 최종적으로 배출되는 것은 기껏해야 암기력 향상된 이들, 순종의 체험을 몸에 새긴 이들, 개인적 성공을 위한 스펙의 한 필수요소로 증명서를 거머쥔 이들, 그리하여 시장에서 판매될 만한 산출물” (96)이 된 이들, 그리하여 사회공동체의 문제 (예컨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에 적극적이고 독립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을 거세당한 이들일 것이다. 요컨대, 그 과정을 통해 배출되는 것은 직업적 기능인-고용 가능한 인적 자산-순종적 국민이지, 비판적 사색인이자 능동적 정치 참여자로서의 시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육의 과정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민주주의 기반 훼손의 과정이란 말인가? 과연 이러한 교육과 한국 민주주의의 미성숙이라는 사태가, 예컨대 노동자농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에 대한 터무니 없이 낮은 지지율이라는 기형 상태가 전연 무관한 사태일까? 과연 이러한 교육과 사회 전반의 무책임의 기풍이 (새 휴대폰 구입 후 폐기된 구형 휴대폰이 어디로 가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줄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생태계/인권에의 관심 자체를 금기시하는 악독한 문화 풍토를 생각해보라) 전연 무관할까?

 

 

국민이라는 족쇄에서 세계 시민이라는 자유로

이 책이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지니는 함의와 관련해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세계 시민 교육의 강조다. (5) 세계 시민 정신[]을 강조하며 저자가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은 혈통순수주의에 기초한 모든 형태의 민족주의이자 이에 기초한 자민족 중심적 역사 교육이다. 물론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부터의 사회 해방의 사상이 되었던 역사 정황을 근대사의 일부로 거느리고, 민족주의적 정서가 기층민중 문화와, 민족공동체통일, 자주적/독립적 사회의 실현이라는 사회적 당위과제와 혼융되어 있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 저자의 민족주의 비판은 그 호소력이 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사회도 단일혈통을 유지한 순수사회일 수는 없고, 그 모든 순수사회론은 악독한 신화에 불과하다는 저자의 입장은 (64-65) 다문화사회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오늘날 한국의 정황에서 (예컨대 영화 <로니를 찾아서>에 잘 묘사된 한국인의, 한국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종주의적 폭력을 생각해보라) 보배로운 것이 아닐까? 단지 시민이 아니라 세계 시민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그토록 선진한국이라는 자국증심 이데올로기를 삶의 절대 가치로 내면화하는 이들의 사회에선, 그토록 광적으로 한국적 정체성의 확인과 과시에 집착하는 (2002년 월드컵의 광적 열기와 박지성, 김연아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라) 이들의 사회에선, 개인을 자유권의 임자인 시민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언제든 호명 가능한 이인 국민으로 환원시켜 (그 숱한 국민 여러분운운을 생각해보라) 끊임없이 국가적 통일성과 일률성을 강조하는 나라에선, 이러한 국가주의의 열기와 민족주의 정서가 혼융되어 버린 어느 기이한 동방의 나라에선 각별히 중요한 울림을 갖는 말이 아닐까?

 

물론 선진한국선진先進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의 높은 위상은 한국의 다수가 진보進步를 염원함을 말해준다. 그러나 정말로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도리어 국가주도 성장지상주의로부터, 선진한국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선진의 개념을 자체적으로 일신一新/재구성하고 다문화적 공생의 사회를, 시민적 공명과 책임의 사회를 창조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분명히 보이는 한가지 실천의 길은 저자가 강조하듯 아이들을 (민족의식이 아니라) 세계 시민정신을 갖춘, 세계의 사태에 대한 투명한 지식을 갖춘, 그리하여 책임의식을 지닌 시민으로 길러내는 일일 것이다. (146-147) 보다 구체적으로는, 저자가 말하듯, 타 문화권 자체의 종교/문화적 전통을 이해/존중하고 하여 타문화권 출신을 존중할 줄 아는, 전지구적 시점에서 사태를 파악하고 답변을 제시할 줄 아는, 상품의 생산과정과 소비자들의 관계를, 국제 경제의 동학을, 초국적 기업의 세계 지배의 동학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 이해를 바탕으로 책임을 지려 하는자세의 임자가 되는, 세계 시민-한국인을 길러내는 일일 것이다. 단지 한국을 빛냈으므로비로소 소개되는 세계 속 한국인이 아니라, 국익 신장에 보탬이 되었으므로 비로소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아니라, 단지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말이다. 요컨대, 상품도 사람도 이미 뒤섞일 대로 뒤섞여버린 시대에 세계의 실상에 해박하고 그리하여 책임을 질 줄 아는 세계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어느 사회의 맥락에서도 가치 있겠지만, 민족적 정체성의 세계 과시에 병적인 열기를 보이는 사회에선, 제 나라 바깥의 노동 현실에 대해, 제 나라 바깥 세계의 사람들과 생태환경에의 자신들의 가해 현실에 무관심한 이들의 사회에선, 자신의 기여 장소를 국가로 한정시키고 마는 이른바 국민들의 사회에선 훨씬 더 큰 울림을 갖는다. (계속)

 

posted by 소서재인